2009년 10월 9일 금요일

갈라디아서 2장 20절

큐티 본문 전체가 꿰뚫어지지 않으면 묵상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끙끙대게 됩니다. 그 유명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역시 앞뒤 구절이 연결되지 않아 고심을 거듭했습니다.

오늘은 예진이가 학교 안가는 토요일, 재활용쓰레기를 버리는 것만 아니면 바쁠 것 없는 이른 아침을 보낼 수 있는 날입니다. 천천히 시간을 두고 하나님 앞에서 본문을 읽고, 이해가 안되는 부분 옆에 물음표를 치고, 내 생각을 적어보았다가 다시 읽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님, 이 본문이 이해되게 해 주세요.'

본문이 이해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율법에 대한 이해가 잘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자랑이요 베드로조차 포기하기 힘들었던 율법의 막강한 영향력은, 이방 죄인으로 태어난(갈 2:15)우리가 제대로 알기 어려운 것입니다. 율법은 지키기 힘든 규정들이었는데, 유대인들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지켰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프라이드였고 결코 버리기 어려운 자존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리스도와 율법을 같이 가져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뭔가 안맞는 것이 생기게 됩니다. 다른 사람 눈이 의식되고 또 외식하게 됩니다. 갈등이 있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으려하다 우리 자신이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분입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만일 내가 허물어버린 것을 다시 세우려 한다면 나 스스로 율법을 어기는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갈 2:17~18)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로 인해 우리에게 갈등이 있습니다. 내가 어릴 때 순영이의 권유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을 때부터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온 가족이 차를 타고 일요일의 드라이브를 즐기는데에서 빠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장난기 많은 아버지는 나를 가정 평화의 파괴자라고 부르며 내가 울기까지 놀리는 것을 좋아하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가려고 할 때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부딪치게 되고 되려 내가 이래서 되나, 차라리 그만 할 것을 그랬나,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고생하나 싶은 마음이 들게 되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 신랑이 운동하다가 허리를 삐끗해 왔습니다. 뼈를 다친 것은 아니라 근육이 굳은 것인데 혼자서 움직이가 불편해 했기 때문에 목요일에 나가고자 한 무릎기도를 나가지 않았습니다. 지난 주에 러시아와 중앙아시아를 위해 기도하는 팀과 조인하기로 한 주였는데 말이지요. 못 간다는 문자를 조장님께 보낸다고 보낸 것이 팀장님에게 갔기 때문에 조장님이 따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실망하신듯 한 조장님께 못나간 이유를 설명하니까
"그렇죠, (기도모임에) 나오려고 하면 무슨 일이 생겨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할 수 있는 말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생각이 연결이 된 겁니다. '기도모임에 나오려고 하면 무슨 일이 생긴다고? 그럼 내가 기도모임에 나간다고 하니까 우리 신랑이 다친 건가?'조장님의 전화를 받을 때에 방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계속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었는데 갑자기 너무 두렵고 무서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치 나를 비웃는 악한 영들이 집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싶게 오싹해 지기도 했습니다. 아, 믿지 않는 집으로 시집가서 온갖 나쁜 일은 다 자신의 탓으로 받아야 하는 며느리들은 정말 얼마나 힘들 것입니까!

이 예가 맞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삶에 갈등이 빚어지고 힘든 일이 일거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내가 칼을 주려고 왔다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바울은 율법주의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율법으로 인해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이는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고자 함입니다.(갈 2:19)

이기는 일은 그것에 대하여 죽는 일입니다. 견디는 것이 아니라 죽는 것입니다. 나와 아무 상관도 하지 않는 일입니다. 함께 이방인들과 섞여 음식을 먹다가 율법주의자들이 보고 무슨 소리를 한다고 해도 두려워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한다고 해서 무슨 방해가 있든, 그것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 명하신 일을 할 뿐입니다.
죽는다는 것을 요즘은 드린다고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내려놓는다는 말, 올려 드린다는 말도 마찬가지의 뜻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욕망에서 죽기는 참 힘이 듭니다. 하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라고 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기는 참 힘이 듭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는다는 말이 이해가 안되어 끙끙대다가 커피 생각이 났습니다. 이전에 블로그에도 적은 것 같은데 커피에 대한 권리를 하나님께 드린 후로 저는 커피에 대하여 죽은 셈이 되었습니다. 길거리의 커피 전문점이나 커피 할인행사에 반응하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물론 커피를 마시고싶은 마음이나 커피향이 그리워지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 대신 나를 사랑하시고 내게 가장 좋은 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조근 더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육체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 2:20)

드디어 이 구절까지 차근차근 오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접할 때 자신의 자아를 못박는다는 묵상을 하는데 참으로 맞는 해석입니다. 자아라는 말이 너무 추상적이라면 나의 자랑, 나의 성취, 내가 당연히 얻어야 하는 권리, 이런 것들이 십자가에서 못박힌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내가 못박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한 일들, 두려움들이 떠오릅니다. 학생일 때도 있었고 직장생활에서도 있었습니다. 못박지 못하고 내려놓지 못하면 두려워집니다. 믿음이 흔들리게 됩니다.

예진이야말로 하나님께 계속 올려드리는 나의 기도제목입니다. 주님, 예진이로 얻는 나의 자랑이, 나의 성취가 또 권리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리스도께서 사시게 하시옵소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게 하소서.(21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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